‘어느샌가 이곳에 있다’ 멈추지 않고 달려온 ‘지금’이 선사한 미래

신소이

2022년 1월에 입사하여 한국 담당 커뮤니티 매니저로 로스터와 관계 구축 업무를 담당하는 신소이. 2019년 4월, 한국 대학의 교환학생 제도로 일본에 온 뒤 대학 수업과 로프트에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일본어 실력을 10개월 동안 갈고 닦았다. 한국에 귀국한 뒤, 일본어를 사용하는 회사를 대상으로 취업 활동을 했으나 마음처럼 잘 안되던 시기에 TYPICA에 합격한 그녀의 ‘현주소’를 소개한다. (본문 내 경칭 생략)

이색적이었던 TYPICA

“대면 면접이 불가능하다면 채용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일본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던 2021년 9월. 최종 면접까지 간 일본 기업에서 채용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은 소이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노력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소이는 문제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안될 것 같아’라는 부정적인 마음이 겉으로 드러났던 걸까. 그동안 최종 면접까지 올라간 적이 몇 차례 있었으나 합격 통지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본 기업의 외국인 부문이 아니라 마이나비와 리쿠나비(일본 취업사이트)에서 일자리를 찾은 것은 국적과 상관없이 함께 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저를 채용하면 비자 발급이 필요해지는 등의 성가신 일이 늘어나서 일본 학생을 채용한 게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2020년 9월에 취업 활동을 시작해서 1년 정도 됐을 무렵의 일이다. 긴 터널 속에서 출구를 찾는 듯한 날들이 이어지던 가운데 소이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도 잃기 시작했다. 어디든 상관없다,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까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급해진 소이는 작전을 바꿔 ‘일본 기업의 한국 부문’으로 노선을 갈아탔다.  

바로 이때 TYPICA와 인연이 닿았다. 1차 면접의 면접관에게 “(당신을)설명회에서 봤어요. 기억나요.”라고 들었을 때 소이는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홈페이지를 봤을 때와 설명회에 갔을 때 느낀 것은 좋은 의미로 회사 같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데 ‘회사가 아니라 TYPICA다’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회사 대표인 고토와의 최종 면접에서는 더욱 인상적인 경험이 소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회사의 필요 인재가 될지의 유무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지를 파악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억이 약간 흐릿한데 고토 씨께서 ‘준비한 대답 말고 당신의 진심을 이야기해주세요’라고 하셨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취준생’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해봤습니다만 합격할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기쁨보다 놀람이 더 컸습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소이가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한국에서 방영된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와 ‘심야식당’이다. 

두 작품 모두 세상 사람들의 인생사를 ‘식(食)’에 빗대어 그린다. 원래 먹는 것을 좋아하는 소이는 이 소박하고 꾸밈없는 세계관에 매료되었다. 

소이는 대학교 3학년 시절, 드라마 세계에 더욱 몰입하고 싶어서 등장인물의 대사를 필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음 가는 대로 일본어를 익혔다.

그러다 일본어를 사용하는 일을 하고 싶어진 소이는 대학교 4학년의 봄, 교환 학생 제도를 통해 일본에 왔다. 

소이는 유학 전에 ‘절대 부모님께 생활비를 받지 않겠다’라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자신이 정한 것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소이에게 정말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속으로 몰래 결심한 소이는 일본에 오자마자 외국인도 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스스로 돈을 벌자’가 목적이었다. 직종과 업무 내용은 상관없었다. 그렇게 도쿄 시부야에 있는 로프트에서 일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지낸 10개월은 ‘정신없었다’라는 기억밖에 없다. 한 달에 10만엔 정도 벌면서 학교 과제도 해야 하는 일상에 여유를 즐길 틈은 없었다. 과제 제출 기한이 임박하기도 했고 이틀 연속 밤을 새우는 것은 당연했으며 최장 나흘 연속 밤을 새우면서 눈앞에 닥친 시련을 이겨냈다.

그러나 몸은 솔직하다. 대학에서 지낸 시간은 불시에 찾아오는 졸음과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한 번 책상에 엎드리면 깊은 잠에 빠져버리곤 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10분 동안 기절하다시피 자다가 서둘러 교실을 이동한 적도 몇 번이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해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던 게 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일본어의 영역이 점점 커지는 기쁨이 더 크기도 했어요.”

‘절대로 부모님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라는 다짐을 모르셨던 부모님은 유학 시절에 매월 생활비를 보내주셨다. 그러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소이는 그 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귀국 후에 부모님께 전액을 돌려드렸다.

“돈을 받으신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우셨어요. 부모님께서 ‘고생 많았구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든 피로가 날아갈 정도로 기뻤어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로프트에서 했던 아르바이트는 하고 싶어서 지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보낸 나날은 ‘일하는 기쁨’을 알려줬다.

외국인 여행객을 응대하는 면세 카운터에서 일한 소이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 것은 입사 3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습득력이 좋은 소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빠른 포장 기술을 익혔다.

여러 명의 직원이 서 있는 면세 카운터에서 소이 쪽만 손님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누가 봐도 극명했다. 그녀의 민첩하고 빠른 손놀림을 본 손님이 감탄하며 웃은 적도 있고 ‘당신 최고야!’라며 칭찬한 적도 있다.

“저도 뭔가 보답하고 싶어서 해당 국가의 언어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더니 손님과의 거리가 더 좁혀졌어요. 제가 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느낌은 제 마음을 벅차게 했습니다.”

로프트에서 근무한 10개월 동안 소이는 주변이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갑니다”라고 전하자 플로어 점장은 “(사원으로 채용되는걸)기대했는데….”라고 말했다. 아르바이트 동료들도 “소이 씨 없이 앞으로 어떻게 일해?”라며 불안해하기도 했다.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즐거운’ 소이에게 경계선은 없었다. 건물은 다르지만 같은 휴게실을 사용하는 세이부 백화점 직원과 쓰레기장 관리원도 소이에게는 대화 친구였다. 

“그분들께도 인사하는 저를 본 아르바이트 동료는 놀란 모습이었지만 저는 특별한 일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인사드리면 ‘오늘도 왔어?’라고 말을 걸어 주시거나 과자를 주시거나 하며 조금씩 관계가 발전해 가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어요.”

이런 소이의 캐릭터는 대학에서도 여전했다. 약 120명이 재학 중인 법학과에는 모의재판과 교수님과 진행하는 교류회 등 1년에 몇 차례 열리는 정기 행사가 있었다. 원칙상 전원 참가라서 이 행사를 기획 운영하는 위원회 멤버는 조정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요하다.

재수하여 입학한 연상의 동기는 다가가기 힘든 존재였다고 한다. “저 누나 무서워”, “말 걸기 어렵다”라며 거리를 두는 다른 사람들이 “소이가 대신 가줘”라고 부탁한 적이 많았다. 

“저는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싶고 대화가 힘들다면 적어도 인사라도 나누고 싶어요. 눈이 마주쳤는데 인사를 안 하는 건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거든요. 하지만 길 가다가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는 인사 안 한답니다(웃음).” 

차별 없이 사람과 친해질 수 있는 것은 소이의 천성이기도 하다. 그것이 드러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소이와 같은 반에 누구와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 여자아이(이하, A양)가 있었다. A양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소이는 어느 날 “왜 맨날 혼자 있어?”라고 말을 걸었다. 이것을 계기로 A양과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이런 소이의 행동은 주변 분위기도 변화시켰다. 처음에는 “왜 쟤랑 이야기해?”라며 거리를 두던 소이의 친구들도 어느샌가 A양과 대화하게 되었다. 5학년이 됐을 때는 이미 A양을 둘러싼 벽이 깨끗하게 허물어진 상태였다.

“A양은 혼자 있고 싶던 게 아니라 누군가가 말 걸어주기를 기다렸던 거 같아요. 졸업식 날 A양이 “그때 소이가 나한테 말을 걸어준 덕분이야.”라고 말해준 게 아직도 선명해요. 서로 다른 중학교에 진학해서 15년 정도 지난 지금도 그녀와 연락한답니다.”

어느샌가 변해있다

한국의 예술고등학교에서 힙합 댄스를 전공한 소이는 대학의 법학부라는 전혀 다른 진로를 선택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예술 계열에만 가려고 했고 사회 문제와 문학, 과학에는 둔했어요. 좁은 세계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았고 더 다양한 것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선생님께 추천받은 법학부에 가기로 한 거예요.”

이런 생각을 했던 소이가 미지의 세계를 찾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를 습득한 다음에 만난 것이 TYPICA였다.

“일본 팀과 대만 팀의 커뮤니티 매니저님들은 저와 동년배인데 다른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으셨고 일도 잘하세요. 저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해서 스킬도 경험도 부족해요. 부족한 부분만 자꾸 눈에 들어오고 자신감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취업 활동했을 때처럼 눈앞이 깜깜하지는 않아요. 다른 동료들에게 힘을 얻기도 하고 정답을 다 알고 계신 듯한 고토 씨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이곳에서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서요. KPI에 대해서도 달성 못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함이 항상 앞섰는데 점점 어떻게 해야 달성할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로스터분들이 매번 ‘감사합니다’, ‘혼자서 힘드시겠어요. 수고 많아요’라고 말씀해주시는데 그때마다 힘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에는 ‘드디어 생두가 도착했어요. 수고가 많습니다. 다음번에 매장에 오시면 같이 커피 한잔해요.’라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보상받은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인 창업 3년 차인 TYPICA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주 많이 남아있다.

“커피에 관해 잘 모르기도 하고 지금 하는 일로 벅차서 목표는 없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어요.”

그 열쇠는 소이가 부적처럼 여기고 있는 ‘어느샌가’라는 말에 있다.

“눈앞에 놓인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샌가 목표를 달성하거나 소중한 것을 손에 넣게 되는 일이 생겨요.

지금까지의 저를 돌이켜 보아도 고독한 미식가와 심야식당을 처음 봤을 때는 일본에서 유학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고 더욱이 일본어를 사용하는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온 것, 온종일 일본어로 커뮤니케이션하게 된 것, TYPICA에 입사 한 것, 한국 부문에서 혼자 업무를 하는 것…. 이 모두가 ‘어느샌가’ 하게 된 것들이에요.

인간관계도 똑같아요.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로스터분들과 전화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기뻐요. 친해지고 싶어서 대화하는 게 아니라 대화하다 보니 어느샌가 친해져 있어요. 점점 깊은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와도 만날 수 있어요. 그것이 지금 하는 일의 재밌는 점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전략도, 아무리 뛰어난 테크닉도 진심을 이길 수 없다. 이를 증명해온 소이라면 어느샌가 TYPICA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