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사이즈는 품질의 지표일까? ― 케냐 커피 조달을 위한 힌트

록번(Rockbern), 카문야가(Kamunyaka)의 생두와 로스팅 원두
케냐 커피를 선택할 때, 많은 분들이 가장 먼저 스크린 사이즈를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으실까요? 오퍼 리스트를 확인하고, 샘플을 받아본 뒤 구매를 검토하고, 메뉴에 그 이름을 올리기까지.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AA’라는 표기에서 ‘최고 품질’이라는 의미를 읽어냅니다. 그 감각 자체는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스팅과 판매 경험이 쌓일수록, “스크린 사이즈라는 지표에 과연 얼마나 의존해야 할까?”라는 질문과 마주하는 순간도 찾아옵니다.
먼저 정리해 두고 싶은 전제는, 케냐의 등급(AA/AB 등)은 관능 평가가 아니라 스크린 사이즈(물리적 크기)만으로 분류된다는 점입니다. AA는 스크린 사이즈 17/18에 해당하는 가장 큰 규격을 의미합니다. 즉, AA라는 표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콩이 크다’는 사실일 뿐, 풍미의 완성도를 직접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록번의 창립자, 피터 무치리(Peter Muchiri)
그럼에도 AA가 중시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크게 자란 콩은 나무 위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성숙하며, 풍부한 영양을 축적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질량 덕분에 로스팅 과정에서 열을 천천히 받아들이며, 케냐 특유의 밝은 산미와 과일 향을 깨끗하게 끌어내기 쉬워, 결과적으로 컵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AA가 ‘좋은 커피를 만날 수 있는 유력한 입구’로 기능해 온 배경에는 이러한 물리적 근거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AB는 어떨까요? AB는 AA보다 한 단계 작은 16/17 사이즈라는 이유로, 한 단계 낮은 등급으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반복적인 커핑을 진행해 보면, AA와 AB 사이의 품질 차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작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TYPICA의 QC 팀 스코어를 보더라도, 동일한 스테이션에서 나온 AA와 AB의 점수 차이는 대부분 0.25점 내외에 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적인 의사결정은 반드시 커핑에 맡겨야 합니다. AA인지 AB인지는 로스팅을 설계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 조건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불을 통과했을 때 커피 생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컵 안에서 어떤 풍미가 피어나는지, 그리고 자사의 라인업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입니다. 그 해답은 언제나 컵 안에만 존재합니다.
“AB라서”라는 이유만으로 커핑의 선택지에서 제외해 버리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입니다. 훌륭한 AB 로트를 만난 경험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AB는 AA에 비해 FOB 가격이 약 0.5달러 낮은 경우가 많고, 커피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요즘, 커핑에서 납득할 만한 품질의 AB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매우 높은 가성비를 지닌 현명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스크린 사이즈는 유력한 힌트이자 편리한 라벨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목표는 아닙니다. 사이즈라는 선입견을 넘어, 순수하게 커핑의 사실에 기반해 판단하는 것. 그 과정이야말로 숨겨져 있던 AB의 매력을 빛나게 하고, 더 많은 로스터들에게 케냐 커피가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넓혀준다고 우리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