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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정치에 농락당하다 ~ 역경에 굴하지 않는 니카라과

커피 생산지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지역입니다. 그 대다수가 민주주의를 채택하지 않아 독재 정권이 발생하기 쉬워서 정치는 불안정합니다. 그야말로 니카라과를 말하는 듯합니다. 우익 독재, 혁명, 내전에서 벗어나 겨우 평화를 되찾나 했지만, 지금은 좌익 독재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 나라에 처음 간 것은 1984년이었는데 한참 내전 중이었습니다.

국경지대의 최전선에서

내전이란 같은 국민끼리 싸우는 슬픈 전쟁입니다. 당시의 니카라과는 혁명으로 성립된 좌익 정권이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혁명 전의 우익 독재 정권 군사가 반정부 게릴라가 되어 북쪽 인접국인 온두라스를 통해 국경을 넘어 침공했습니다. 그래서 전쟁터는 국경지대였죠.

게릴라를 포격하는 정부군의 포병대 = 1984년, 산후안델노르테에서

이 국경지대가 바로 니카라과 커피의 산지입니다. 수도 마나과에서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를 따라 북으로 230킬로미터 떨어진 곳. 옆 나라 온두라스의 국경까지 20킬로미터도 안 되는 누에바 세고비아주의 주도, 오코탈을 방문했습니다. 커피 생산의 중심지입니다.

한 달 전에 국경을 넘어온 게릴라의 공격을 받은 직후입니다. 도시 중심에 있는 사거리에 서면, 둘러보는 족족 건물 벽은 자동 소총으로 쏜 총탄 흔적투성입니다. 흔적이 깊게 새겨진 이유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쐈기 때문이죠. 커피 출하장, 방송국 등은 다 타버렸습니다. 도로에는 모래주머니가 높이 쌓여있어 자동차가 다닐 수 없습니다. 교외 지역에서는 전차 16대의 포신이 북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호텔 프론테라(=국경 호텔)’의 지배인은 “게릴라는 이 근처에 매우 많습니다. 항상 위험하죠.”라고 말하며 체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새벽의 게릴라 습격으로 총격전을 치른 마을 중심부는 모두 총탄 흔적투성이였다 = 1984년, 오코탈

최전선으로 갔습니다. 국경 바로 앞에 있는 언덕 위에서 정부군이 끊임없이 포격합니다. 포신만 해도 4m나 되는 곡사포 옆에 앳된 얼굴의 소년병이 자동 소총을 어깨에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12살의 헥터 곤살레스,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자원해서 최전선에 왔다고 합니다. 이유를 물어보자 “공부하고 싶거든요.”라는 묘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국가가 평화롭지 않으면 차분하게 공부할 수 없어요. 군사가 한 명이라도 많으면 빨리 이겨서 전쟁을 끝내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하더군요. 그는 반년 동안 전쟁터에서 싸웠고 남은 반년은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나 공부하고 싶어 하는지 물어보니 눈을 반짝이며 “저는 해양생물 학자가 될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전쟁터에서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이야기하는 초등학생에게 감동했습니다. 불행한 환경에 굴하기는커녕 꿈을 자기 손으로 개척하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죠. 이것이 전형적인 니카라과인의 기질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민족성입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12세 소년병 헥터 곤살레스 = 1984년, 산후안델노르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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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어깨에 메고 커피를 수확한다

중부의 산악지대 마타가르파주에 있는 농원을 방문했을 때는 수확이 한창이었습니다. 산의 비탈길을 가득 덮은 커피나무에 마을 주민 180명이 달라붙어 빨간 열매를 따서는 허리에 매단 대나무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남성은 어깨에 자동 소총을 매고 있습니다. 바구니가 가득 차면 비탈길 아래에 있는 농원 정원에 깐 돗자리 위에 열매를 흩뿌렸습니다.

돗자리 위에 앉아서 잘 익은 빨간 열매와 아직 초록빛인 열매를 구분하는 것은 두 명의 아이였습니다. 11살인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 베르나르다와 그녀의 동생이자 10살인 파비오. 매일 아침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폭염 속에서 단조로운 작업을 합니다.

Photo: Maren Barbee

두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이후 매년 1월부터 3월까지의 겨울 방학 기간에 이 일을 해왔습니다. 베르나르다는 이미 4년 차인 베테랑입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정부군 군모를 쓴 파비오의 갈색 바지는 무릎 부분에 구멍이 나 있고 허벅지 부분은 크게 찢어져 있습니다. 부모님도 이 농원에서 일하는데 아이들의 옷을 수선할 여유도 없는 것이죠.

베르나르다는 “어른이 되면 의사가 되고 싶어요. 지금 가장 모두가 필요로 하는 직업이거든요. 마을 사람이 아프면 제가 진료하는 거예요.”라고 씩씩하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녀는 커피 체리를 한 알 따며 말했습니다. “똑같아 보이죠? 하지만 한 알 한 알 표정이 달라요.” 하지만 그 한 알분의 커피조차도 그녀는 마실 수 없습니다.

잘 익은 열매는 마을 산기슭에 있는 정제 시설 베네피시오 산 카를로스로 보냅니다. 햇빛에 말려 건조한 뒤에 포장하여 일본과 유럽으로 출하합니다. 이 작업은 파란색 옷을 입은 남자들이 담당합니다. 다들 묵묵히 작업 중입니다.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을 뿐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죄수였습니다. 혁명 전의 독재 정권의 군사들로 징역 30년을 선고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파란색 옷은 죄수복이었던 것이죠. 매일 아침 교도소에서 이곳으로 호송되고 저녁에 다시 옥사로 돌아가는 생활을 길게는 7년 이상 한 사람도 있습니다.

정제소에서는 250명이 일하며 양질의 수출용 커피를 만듭니다. “작년에는 전쟁 때문에 산에 들어가 수확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올해는 매우 질이 좋아서 기대할 만합니다.”라고 회계 담당 마르타 씨가 말했습니다. 전쟁 상황의 좋고 나쁨이 그대로 수입과 직결됩니다.

마타가르파 시내에 커피 수확 봉사자를 모집하는 사무소가 있었습니다. 포스터에 ‘커피 투쟁에 모두 참여합시다. 생산 여성여단’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모든 여성이여, 참호로 가자. 평화와 혁명을 위해.’라는 슬로건도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여성 군사가 눈에 띕니다. 여성이 강한 나라지요. 모집 공고를 보고 한 달간의 커피 노동에 252명이 지원했다고 합니다.

잠깐의 휴가에 딸을 안는 여성 병사 = 1984년, 마나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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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디니스타 혁명

1979년에 니카라과에서 성공한 것이 산디니스타 혁명입니다. 이전까지는 군사 독재 정권이 오랜 기간 이어졌습니다. 민주주의와 부의 공정한 분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결성한 좌익 게릴라의 이름이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입니다. 과거 독재에 맞서 싸우다 살해된 산디노 장군의 후계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동서 냉전의 시대였습니다. 미국의 레이건 정권은 좌익 정권을 싫어해서 망명한 구 독재정권 군사를 모아 우파 게릴라로 만들어 니카라과의 북쪽 인접국인 온두라스에 기지를 세우고 국경을 넘어 니카라과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비용은 미국이 냈습니다. 즉 미국이 선동한 전쟁입니다.

국민의 분노는 전쟁을 유발한 미국을 향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좌익 정권에 대한 지지가 커졌습니다. 좌익 정권에는 강경파만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화인이 많았습니다. 부대통령은 작가였고 장관급 인사에는 시인들도 있었습니다.
장관급 인사에는 가톨릭 신부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4명이나요. 보수적인 가톨릭계지만 당시의 중남미에는 진보적인 ‘해방의 신학’이라는 이념이 확대됐습니다.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변혁의 선두에 섰습니다.

산디니스타 혁명 5주년을 기념하는 식전이 열렸다 = 1984년, 마나과에서

그 중 한 사람, 문화대신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는 남부의 니카라과 호수에 있는 솔렌티나메 군도에 농업 협동조합을 만들어 농민들의 회화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농민이 유화 도구로 주변 풍경을 그리는 것이죠. 잎사귀 하나하나 정성껏 그리기 때문에 ‘소박화(素朴畵)’라고 불립니다. 원색이 선명하여 농민의 삶도 자세히 엿볼 수 있습니다.

작품 중에 ‘커피 농원의 한창때’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녹색을 기조로 하얀 꽃을 피워 빨간 열매가 열린 커피나무들이 앞에 있고 돛단배를 호수에 띄운 사람과 숲의 나무 그늘에 숨어있는 토끼, 꽃에 모여든 알록달록한 나비도 그려져 있습니다.

멕시코의 미술 평론가는 “진실을 추구하는 데, 또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투쟁에서 니카라과의 전사와 솔렌티나메의 화가 사이에 차이는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중남미에서는 문화도 투쟁입니다.

소박화(素朴畵)로 그려진 커피 농원

수도 마나과의 빈민가에서 만난 중학생 여자아이인 오네이다 씨는 “혁명 덕분에 다들 평등해졌어요. 저도 바이올린을 하고 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악기를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고 애초에, 학교에 가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은 가난하고 전쟁으로 더욱 생활이 어려워졌지만, 문화를 추구하며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원래 의욕적이고 시인을 많이 배출한 국민인 만큼 전쟁뿐만 아니라 문화 운동도 발생했습니다.

Photo: Susan Ruggles

혁명의 추락

내전은 1990년에 끝났습니다. 평화 협약이 성립되어 치러진 선거 결과, 산디니스타는 패배하여 중도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긴 세월의 전쟁으로 지친 국민은 좌파, 우파가 아닌 온화한 정치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이후의 부흥은 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정권을 쥔 정치인 중에는 국외로 도망간 부자의 저택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권력을 통해 재산을 불리는 사람까지 등장했습니다. 혼란 속에서 정치적인 대립이 커지자 선거에서 다시 좌익 산디니스타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정치적 반대 세력을 배제하고 실권을 손에 넣은 것은 좌파 원리주의인 듯한 오르테가 대통령이었습니다. 대통령 재선 금지 규정을 철폐하고 부인을 부대통령으로 만들어 독재 체제를 이루었습니다. 이 때문에 양심적인 사람들은 산디니스타를 떠났습니다.

불만을 가진 시민에 의해 2018년에 반정부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경찰은 탄압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고 시민 30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야당 지도자들은 투옥되었고 극심한 탄압 사회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우익 군사 독재, 현재는 좌익 독재입니다. 니카라과인 저널리스트 동료들은 “오르테가는 스탈린이 되었어.”라고 말합니다.

Photo: Jorge Mejía peralta

외국 기업은 퇴각하고 애초부터 적었던 관광객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2018년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 3%를 기록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생활이 불가능하다며 10만 명 이상의 사람이 난민이 되어 국외로 나갔습니다. 혹은 국내에는 일이 없으니 해외로 가서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코로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주변국에서 100만 명 규모의 확진자가 발생하는데도 니카라과 정부가 발표한 확진자 수는 1만 명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합니다. 정보 조작보다는 정보 은폐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죠. 이러한 정권은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국외로 나간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미국에 중미 난민이 몰려와서 당시에 트럼프 대통령이 국경을 폐쇄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이들 중에 니카라과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난민이 되어 미국에 가도 생활이 가능하다는 보장이 없고 애초에 미국은 그들의 입국을 허가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니카라과인의 대부분은 남쪽에 있는 코스타리카로 갔습니다. 코스타리카는 난민을 모두 수용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수용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난민이 자립할 수 있도록 국가가 응원하며 5년 거주하면 국적도 취득할 수 있습니다. 사실 코스타리카의 커피 농원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대부분이 니카라과인입니다. 정착한 사람도 있고 계절노동자로 일시적으로 온 사람도 있습니다. 니카라과는 점점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코스타리카는 신규 노동력으로 발전하는 흐름이 되었습니다.

Photo: J. Arguedas / European U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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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에 대한 열정

그러나 니카라과 국민은 꺾이지 않습니다. 혁명을 한 번은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강권 체제에 언제까지나 의존할 수는 없지요. 사실, 이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립적인 경제 활동을 추진하는 사람은 존재합니다.

앞서 게릴라에 습격당한 오코탈시의 모습을 설명해 드렸습니다만, 이곳에 사는 훌리오 페랄타 씨가 대표를 맡고 있는 페랄타 커피가 좋은 사례입니다. 훌리오 씨가 2022년 10월에 일본에 오셨을 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훌리오 씨는 국경 지대에 74ha를 가진 광활한 커피 농원의 경영자로 4대손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학교 여름방학이면 트럭 짐받이에 올라타 수확 작업을 했습니다. 청년기에는 내전이 발생하여 미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평화가 찾아와 전쟁이 끝난 것을 계기로 고향으로 돌아왔고 커피 산업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화산 폭발과 대지진이 잇달았죠. 커피의 국제 가격 하락으로 애써 생산해도 수입을 얻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겨우 궤도에 오른 2018년에는 폭동이 일어나 수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농원을 포기하며 커피 산업에서 손을 뗀 동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커피 농가의 일은 역경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기후 변화와 정치 정세의 급변화, 인력 부족 등 힘든 상황은 항상 존재합니다.”라며 “니카라과인의 특성인 강한 끈기를 발휘하여 계속해서 노력합니다.”라고 전했습니다.

니카라과의 커피를 구한다면 차분하게 맛을 느껴보고 싶네요. 적극성이 담겨있는 그 맛을 말이죠.

Periodista internacional

Chihiro ITO

국제 저널리스트. 1949년생, 야마구치현 출신, 도쿄대 법학부 졸업. 학창 시절에 쿠바 사탕수수 수확 국제 봉사 참여, 도쿄대 ‘집시’ 조사 탐험가 대장으로 동유럽의 유랑민 ‘로마 민족’을 조사함. 74년,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상파울루 지국장, 바르셀로나 지국장, LA 지국장을 역임하는 등 ‘AERA’ 창간 편집부원으로 동유럽 혁명 현지 취재와 같이 주로 국제 문제를 보도했다. 2014년 9월에 퇴직. NGO ‘코스타리카 평화를 위한 모임’ 공동 대표. 지금까지 82개국의 현지 취재를 진행했다.
공식 홈페이지는 https://www.itochihi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