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의 이미지를 바꾸다’ 위기감과 반항심이 불러온 다품종 재배의 길
콜롬비아 남부 후일라 지역의 아세베도에서 3대에 걸쳐 30년 이상 커피 농원을 운영 중인 조안 베르가라. 2018년에 은퇴한 아버지에게 경영을 물려받아 전통적인 카투라 품종만 재배했던 커머셜 커피 농원을 다품종 재배로 전환하여 현재는 전량 스페셜티 커피를 출하하게 되었다. 생산자에 그치지 않고 로스팅과 커핑(cupping) 기술도 습득하여 로스팅 기술을 겨루는 한국 대회에서 28세의 나이로 생산자 겸 로스터로 1인 2역을 하여 우승했다. 고향에서도 매년 수확 후에 생산자들이 모이는 커핑을 주최하는 등 리더로 평가받는 조안.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양성과 재현성
안데스산맥 남부의 산기슭을 타고 펼쳐진 후일라 지역은 토양이 비옥하여 콜롬비아 내에서도 커피 생산에 적합한 곳이다. 아마존에서 불어오는 남풍과 카리브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체리가 잘 무르익고 특유의 단맛이 도드라진다. ‘생기 넘치는’ 산미는 콜롬비아의 다른 산지에서 재배한 것과 확실히 차이가 있다.
후일라에서 3대째 이어진 농원 ‘라스 플로레스’를 운영하는 조안은 24세에 경영을 물려받았고, 생산량 중시에서 다품종 재배를 통해 퀄리티를 중시하는 경영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영 방침을 둘러싸고 아버지와 대립한 적도 있지만 정제 전문인 형과 인사, 판매를 담당하는 동생과 함께 핑크 버번, 레드 버번, 타비, 자바, 마라카투라 등 새로운 품종을 조금씩 늘려왔다.
“우리는 (SCA 기준으로) 90점을 받을 수 있는 커피를 키우는 건 아니지만 모든 품종이 항상 87~88점을 받을 수 있다면 잘 팔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카투라 품종의 단일 재배를 계속했다면 지금쯤 농원은 문을 닫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운영했을 때부터) 커피 업계가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다음 세대에는 뭔가 특징이 필요했고 우리에게 그것은 다양성이었습니다.”
좋은 질의 커피가 안정적으로 생산된다면 우위성은 높아지지만, 다품종의 경우 작업과 관리도 복잡해진다. 조안은 농원의 해발 고도와 토양에 맞는 품종을 찾기 위해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다. 지금까지 모두 한 번에 정제했던 체리의 경우 특히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들을 선별하여 별도의 공정에서 정제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조안이 고심한 것은 ‘재현성 있는 프로파일 만들기’였다. 농원 내의 ‘미생물 연구소’에서 수확한 모든 커피 체리에 부착된 미생물의 종류와 수를 조사하여 결과를 분석했다. 이에 따라 각 품종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서 프로파일을 안정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3년 정도 전부터 자연스럽게 정제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지금도 실패를 하지만 몇 번이고 시행착오를 거쳐서 재현성 높은 커피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커피는 신선 식품입니다.”
아버지의 처벌과 어머니의 말씀
조안에게 농원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존재였다. 단지 그곳은 ‘침상’이자 ‘산책 목적지’일 뿐이었다. 녹병이 유행하면서 수확이 급감했고 도산 위기에 처했다. 2000년쯤부터 커피의 국제 가격 폭락이 몇 년간 지속된 ‘커피 위기’에 농락도 당했다. 이러한 생산의 불안정을 겪은 조안은 자신이 농원에서 일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의기소침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커피 업계에 미래가 있는 걸까?’라며 불안해했다.
그러한 조안이 생산자의 길을 가게 된 계기는 중학교에서 유급된 일이었다. 낙제한 벌로 아버지가 1년간 농업을 하라고 하셨다. 커피 농원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강제 노동’은 후일라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처벌이다.
“농업은 정말 싫었어요. 저는 나중에 커서 자동차 수리공이 되고 싶었어요. 공부는 그냥저냥 했는데 친구랑 놀거나 파티에 가거나 하는 게 더 재밌었어요. 15살쯤에 반항기가 왔거든요. 농원의 작업량이 아주 많고 일이 정말 힘든 걸 알았기 때문에 어떤 벌이라도 받을 테니 ‘농원만큼은 싫어요’라고 아버지한테 부탁했었어요.”
그러나 1년간의 농업을 끝낸 조안은 아버지에게 “이대로 농원에 남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로 했으나 마음은 굳건했다.
“‘농업은 즐겁다’라는 감정이 힘들고 지루함을 앞섰어요. 그리고 땅을 경작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땅에 뿌린 씨에서 식물이 자라서 이윽고 꽃을 피우는 생명의 사이클이 멋졌어요.”
한편 조안은 어머니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는 2006년 ‘컵 오브 엑셀런스 (Cup of Excellence, COE)’에서 16위로 입상하였다. 그녀는 그로부터 6년 뒤에 세상을 떠났지만, 콜롬비아 내에서도 비교적 조기에 스페셜티 커피의 가능성을 믿고 있던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호기심이 왕성하고 항상 다음 수를 생각하던 분이셨어요. 커피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단다’라고 가르쳐주셨어요. 양으로 승부하는 아버지의 비즈니스에 대해 어머니는 부정적이셨어요. 물론 당시에 스페셜티 커피에 대해 잘 아시던 건 아니었지만 가까운 미래에 커피의 세계가 변할 거라고 깨달으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의 입상으로부터 몇 년 뒤, 조안은 우연히 옷장 안의 옷들 사이에서 ‘COE2006’이라고 적힌 야구 모자를 발견했다. 어떤 대회인지는 잘 몰랐지만, 조안의 질문에 대답하던 어머니는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더 파고들고 더 공부하렴’이라고 응원해주셨다.
“어머니는 ‘모든 직업은 예술이란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커피 생산자가 될 정도로 쉽지 않으니까 커피를 좋아한다면 커피의 배경을 연구해야만 한단다.’라는 가르침이 제 인생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커피에 대한 가치관은 분명 어머니께 물려받은 거예요. 커피의 세계에서 일하는 건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정말 절묘한 콤비네이션이네요.”
경험을 나누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듯 조안은 후일라 지역의 중심 도시인 피탈리토에 있는 SENA(국립 직업 훈련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커피를 공부했다. 농원 도우미 신분인 조안이 가장 처음 놀란 것은 로스팅과 커핑, 수출입 등 각 공정의 전문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르겠는 부분은 질문하고 피드백을 받으며 커피 관계자와의 인맥을 쌓았다.
“SENA에 들어가기 전에는 체리를 씻고 건조해서 옮기면 ‘이상, 끝’인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콜롬비아의 어딘가에서 커핑을 배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커피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다는 걸 깨달은 그는 SENA를 수료하고 농원으로 돌아갔다. 수확과 발효, 정제 방법을 처음부터 재검토하며 로트 단위로 여러 실험을 시작했다. 그리고 첫 번째 시도에서 87점이 나왔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생산자의 약점은 상품으로서의 커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요. 그 후로 2년 반 동안 커핑을 공부했습니다. 커피의 다양한 풍미에 대해 알고 싶어졌거든요.”
조안의 탐구심과 행동력은 2019년에 한국에서 열린 ‘Master of Cafe(마스터 오브 카페)’에서 결실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생산자와 로스터가 2인 1조로 엔트리 하는 대회인데 2인 1역으로 우승한 것이다. 그리고 조안은 동시 개최한 옥션에서도 우승했다.
지역의 리더와 같은 존재가 된 조안은 ‘커피 일은 공동 작업’이라는 마음이 누구보다 강하다. 하나의 예로 매년 수확 후에 생산자 동료들을 모아서 개최하는 커핑이 있다. 동료들과 재배와 정제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 한 해를 돌아보기 위해 시작했다. 후일라의 생산자 중에는 고생해서 얻은 데이터와 노하우를 공유하기 꺼리는 사람도 있지만 조안은 “비밀 같은 건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생산자와 성공도 실패도 포함하여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함께 공유합니다. ‘이 커피는 맛있어’, ‘좀 더 물속에서 발효해야겠어’ 같은 생산자들의 의견과 조언은 유익한 피드백이고 건전한 경쟁이 장려됩니다. 이것이 후일라, 나아가 콜롬비아 전체의 레벨업으로도 이어집니다.”
생산자는 ‘보통의 시골 사람’이 아니다
조안은 시행착오 끝에 다품종 재배의 길을 열었지만, 결코 현재 상황을 낙천적으로 보지 않는다. 후일라는 현재 후계자 부족이라는 문제에 직면해있다.
“최근 연구에서 후일라의 생산자 중 약 50%가 몇 년 이내에 소멸할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되었습니다. 부유한 생산자가 건설업과 운수업같이 수익률이 더 높을 것으로 보이는 업계로 갈아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커피 생산을 포기하고 토지를 매각해버려서 누구에게도 계승하지 않았습니다. 또 시골 생산자는 포기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윗세대분들은 가격 면에서 커피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여 자식들에게 ‘가업을 잇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콜롬비아에서는 ‘커피 생산자 = 시골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조안도 ‘생산자는 가난하다’, ‘수익화할 수 없다’라고 투덜대는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서 신세대의 고뇌를 잘 알고 있다. 동 세대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이 주저하는 기분도 이해한다. 하지만 조안이 커피 생산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커피를 통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커피가 ‘맛있다’, ‘훌륭하다’라고 평가받으면 외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정제와 개량에 힘쓰는 혁신가로서 무엇보다 기쁜 일입니다. 그러면 생산자는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커피 생산은 단순하게 ‘시골 사람의 일’이 아니라고 깨닫게 되죠. 이 묘미를 저와 동 세대 사람들도 느꼈으면 좋겠어요.
생산자분들은 모두 커피를 기초부터 배우고 열정을 갖고 노력합니다. 그 결과 콜롬비아산 커피가 세계에서 유명해졌죠. 지역 경제에도 콜롬비아 경제 발전에도 공헌합니다. 우리에게 커피는 열정입니다. 친구가 엄청난 저택에 살건, 어떤 일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아요. 얼마나 준비하고 얼마나 좋은 프로세스를 거치는가가 중요합니다.”
조안의 생두를 취급하는 콜롬비아의 수출 업자 ‘CATA EXPORT’의 피에르 파르제통도 그의 열정에 매료된 사람 중 하나다.
“조안은 스페셜티 커피가 단순하게 스코어뿐만 아니라 윤리관이 중요시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커피를 비싼 가격으로 사서 투명성을 확보하고 가능한 한 커피 업계에 공헌하고자 합니다. 같은 가치관을 가진 조안과 일을 하는 건 정말 큰 의미가 있어요.”
커피는 조안을 다른 세계로 부르는 음료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잔, 오전 10시와 정오, 오후 2시…. 작업 중간에 2시간 간격으로 커피를 마시는 것이 그의 루틴이다.
“커피를 마시면 항상 그 배경에 있는 역사와 수확에 관여한 사람들, 정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순환되는 듯한 시간이죠. 커피 한 잔에는 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담겨 있다고 실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