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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긍심 높은 생명력 ~ 압도된 원주민의 나라 과테말라

과테말라는 화산과 밀림의 나라입니다. 해발 고도 4,000미터를 넘는 중미에서 제일가는 고산이기도 합니다. 밀림 속에는 과거에 번영했던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들이 있고 고도의 달력과 그림 문자를 새긴 유적이 숨어있습니다. 위대한 문화를 만든 것은 원주민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중남미에서 가장 원주민의 인구 비율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페인인에게 정복되어 강제로 커피 농원에서 일해야 했죠. 여기서 일본에 수출된 커피는 이전에 일본어로 ‘ガテマラ(가테말라)’라고 표기되어 강한 산미와 목 넘김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그 커피에 담긴 쓴맛은 고역을 겪은 원주민의 고뇌 그 자체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눈앞에 광활한 호수가 펼쳐집니다. 화산 분출로 형성된 칼데라 호수입니다. 중앙에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원뿔꼴 화산이 세 개 있습니다. 모두 높이 3,000미터를 넘습니다. 호수 면에 산이 투영되어 한순간 숨죽일 정도로 아름답죠. 모래사장의 선착장에서 보트가 조용히 미끄러져 나갑니다. 꿈만 같은 광경입니다.

이 아티틀란 호수는 수도 과테말라시에서 서쪽으로 약 15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해발 고도는 1,560미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불릴만한 호수와 산에 시선을 빼앗기다 보니 시간이 흘러갑니다. 공기는 맑고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상쾌하죠. 무릉도원이란 이곳을 뜻하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호숫가에 있는 파나하첼 마을에서 본 아티틀란 호수 = 2002년, 파나하첼에서

풍경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호수 근처를 걷는 원주민분들, 특히 여성의 경우 형형색색의 화사한 민족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섬세한 자수가 새겨진 청록색의 상의에 감색과 하얀색 세로줄 무늬 스커트, 하얀 바탕에 노란색과 빨간 꽃, 새가 그려진 상의 등이 보입니다. 상의는 위필이라고 하는 마야 민족 특유의 머리부터 뒤집어쓴 관두의입니다. 무명의 직사각형 천을 겹쳐 만든 간단한 구조입니다. 스커트도 직선으로 재단한 랩스커트 형태로 코르테라고 부릅니다.

마야 민족이라 해도 다 똑같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원주민은 22개의 민족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온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을 합쳐서 23개이죠. 원주민은 민족마다 언어가 다르고 스페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합니다. 민족마다 의상도 다릅니다. 아니, 같은 민족이라도 마을에 따라 의상이 다르네요. 그래서 착용한 옷을 보면 어느 민족의 어느 마을 출신인지 알 수 있습니다.

텐트를 친 포장마차 같은 토산물 가게가 늘어서 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그림 한 장입니다. 폭 40센티미터 정도의 가로로 긴 캔버스에 눈앞의 풍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호수와 화산의 양옆에는 빨간색과 초록색 열매가 가득 달린 커피나무가 있습니다. 커피 체리를 손으로 따는 남녀 4명도 있네요. 여성은 하얀색 세로 줄무늬의 위필과 빨간색 코르테, 남성은 빨간색과 초록색 상의와 하얀 바탕에 세로줄 무늬의 무릎 기장 바지를 입었습니다. 허리에 끈으로 바구니를 고정해 채집한 열매를 넣습니다. 지면에 있는 마대에는 바구니에서 옮긴 열매가 넘칠 듯 가득합니다.

가게는 커피도 팔았습니다. 평범하게 포장된 것도 있고 자수가 놓인 천으로 작은 복주머니를 만들어서 그 안에 제품을 넣은 것도 있습니다. 주머니에 달린 끈에는 민족의상을 입은 5센티미터 정도의 인형이 달려있습니다. 가격은 저렴하지만, 주머니를 열어서 안에 든 커피를 보니 알맹이가 제각각이라 맛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땅을 뺏긴 원주민

여기서 수도까지 차를 타고 30분 가면 옛 도읍인 안티과가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답게 포장 돌이 깔린 길을 따라 멋진 콜로니얼 스타일의 집들이 보입니다. 스페인 식민지 당시, 이곳에 총독부가 있었습니다.

스페인어 어학당이 아주 많고 일본인도 배우고 있죠.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인이 준 일본의 인스턴트 커피만큼 맛있는 것이 없었다.”고요. 지역에서 생산된 진짜 커피를 그들은 마셔본 적이 없는 것이죠.

세계 문화 유산 마을 중심부의 대성당 = 2002년, 안티과시에서

이 마을과 조금 전의 아티틀란을 잇는 일대를 보카 코스타라고 부르며 커피 플랜테이션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곳의 북쪽은 2,000~3,000미터급 화산이 33개나 즐비한 산악지대로 산 중턱이 커피 재배에 최적지입니다.

일대에는 대규모 커피 농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둘러보면 셰이드 트리로 직사광선을 차단한 커피나무들이 늘어서 있죠. 광활한 정원에 커피콩을 펼쳐 놓고 햇빛으로 건조하는 정제 시설도 보입니다. 소규모 농원이 많은 코스타리카와 달리 광활한 농원이 발달한 것은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 스페인인의 정복자들은 무력의 힘을 빌려 원주민을 지배했습니다. 그들을 노예처럼 부려서 인디고 등의 염료를 채취하고 본국으로 보냈죠. 그러나 영국의 산업 혁명으로 화학 염료가 탄생하여 자연염료는 팔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코스타리카에서 이익이 나는 커피였습니다.

1871년부터 15년 동안이나 독재 권력을 휘두른 바리오스 대통령은 강권을 이용하여 원주민 공동체의 농원을 몰수하여 커피 농원으로 바꿨습니다. 옥수수를 심어서 자급자족하던 원주민은 살아갈 수 없게 되어 커피 농원에 고용되어 일할 수밖에 없었죠. 커피 수출용 철도 공사에도 원주민이 동원되었습니다. 임금은 생활이 불가능한 소액이었습니다. 1934년에는 원주민이 1년 중에 일정 일수를 커피 농원에서 의무적으로 일해야 하는 법률이 만들어졌습니다. 원주민을 가둔 채 국가와 대농원주가 사실상 노예처럼 부린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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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덕적인 인권 무시

그 후 한 때는 민주적인 시대가 와서 원주민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농지 개혁도 계획되었지만, 미국이 개입하여 군사 독재 정권이 일어나 원주민의 꿈은 사라졌습니다. 독재에 반발하는 농민이 무기를 들고 1960년부터 내전에 돌입했습니다. 군은 복종하지 않는 원주민을 학살했습니다. 이 시대의 현실은 노벨 평화상을 받은 키체족 여성 리고베르타 멘추 씨의 책 ‘나, 리고베르타 멘추’(新潮社(신초샤), 엘리자베스 부르고스 저)에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8살부터 체리 피커로 농원에서 일을 했습니다. 하루에 15킬로그램을 따는 것이 기본이었죠. 8살 소녀에게 15킬로그램은 중노동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70엔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체리를 딸 때 가지를 훼손하면 급여에서 차감되었습니다. ‘작업 감독들은 커피 잎 한 장이라도 훼손할까 노동자의 손을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습니다. 병에 걸려도 치료받지 못했고 자신들이 만든 커피를 마시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습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민 운동을 한 탓에 군에 살해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군에서 고문당해 상처투성이로 밀림에 방치되었고 온몸에 구더기가 끓어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시체를 마을 사람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군대가 지켰고 독수리와 들개에게 먹힐 때까지 방치되었습니다. 오빠는 농약을 맞아 중독사, 동생은 군중 앞에서 나무 기둥에 묶인 채 불에 타 죽었습니다. 얌전히 일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극형에 처한 것이죠. 이런 심각한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인터뷰에 응하는 리고베르타 멘추 씨 = 2003년, 과테말라시에서

국내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궁핍한 현상을 국제적으로 호소하기 위해 그녀는 우선 스페인어를 배웠습니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공용어를 할 줄 몰랐던 것이죠. 인권 활동가가 되어 군사 정권의 비도덕성을 전 세계로 알려서 1992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첫 한마디는 “군은 존재 자체가 인류에게 해를 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원주민은 대농원주에 복종하여 커피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에서 ‘가테말라’라고 불리던 시대입니다. 과테말라로 올바르게 발음하는 것이 당시 일본인에게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관심에 그쳤습니다. 커피를 마셔도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생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상황은 국외에 잘 이해받지 못했죠.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그랬습니다. 맛있다고 하면서도 그 액체가 원주민의 고생에 의한 산물이라는 사실을 당시 커피 업계는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photo: Cancillería del Ecuador

내전에서 전환

내전이 끝난 것은 1996년입니다. 그때까지 36년 동안 약 20만 명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대부분이 원주민입니다. 군에 탄압받은 원주민뿐만 아니라 군에 고용되어 자경단에 들어가 원주민을 살해한 혼혈인들도 있습니다. 2002년에 과테말라를 방문하니 전국에서 모인 원주민 2만 명이 자신들의 문화와 아이덴티티를 인정하는 법률 제정을 요구하며 수도에서 시위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직전에 전 게릴라 지도자이자 평화 후 선거에서 시장으로 당선된 원주민 대표가 암살당한 것이 계기입니다.

이러한 오늘날에도 대립은 이어지는 중입니다. 내전으로 남편과 가족이 사망한 유족 1만 3천 명이 조직한 여성 모임의 대표와 만나보니 “평화가 실현된 후에도 인권 운동가 암살이 이어지고 학살 책임자가 지금도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협박받으며 활동하는 것은 솔직히 무섭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진상 규명에 협조하는 일본인 여성은 “사람들은 증오와 공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간신히 학살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게 되었습니다. 2013년 군사 독재를 한 전 대통령이 제노사이드 죄목으로 금고 80년을 선고받아 수감되었습니다. 조금씩이지만 진보 중입니다.

photo: Daniele Volpe/ICRC

커피를 둘러싼 상황도 변했습니다. 1991년, 커피 가격 위기를 계기로 양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고급 블렌드 커피를 지향하는 쪽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현재 안티과 제품은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아티틀란 호수 일대에서는 영세 농민이 손수 재배하여 고품질 커피를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과급제 고용이 많아 아이들도 커피 수확을 위해 아동 노동을 합니다. 2001년의 커피 위기로 커피에서 더 돈을 버는 농산물로 전환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습니다.

과테말라 커피에 있어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전 세계 두 번째로 중요한 시장인데 수출용 커피의 14%가 일본에 수출됩니다. 일본 수출용에는 특히 최고급품이 들어갑니다. 예전부터 팬이 많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가테말라’가 아니라 올바르게 ‘과테말라’로 발음하고 그 제품을 누가 어떻게 만드는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요?

원주민의 자긍심

도시화하지 않은 원주민 삶의 모습을 보고자 리고베르타 멘추 씨가 소속된 키체족의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아티틀란에서 차로 1시간 반 떨어진 산골에 있는 치치카스테낭고입니다. 산의 능선에 있는 마을이고 해발 고도는 1,965미터입니다. 상당히 관광지화되었으나 원주민의 삶은 그대로 남아 주 2일은 시장이 열리고 주변 마을에서 수만 명의 원주민이 모입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축젯날이었습니다. 마을 중심에 있는 1540년에 지어진 순백의 교회 앞은 주민으로 가득했습니다. 광장에 등장한 것은 백인 얼굴 가면을 쓰고 금색의 갑옷 같은 의상을 입고 머리에는 새의 깃털 장식을 단 묘한 무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 온 정복자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은 원주민 기도사의 기도에 맞춰 춤췄습니다.

1540년에 세워진 산토 토마스 교회의 축제 = 2002년, 치치카스테낭고에서

광장에서 나와 거리를 걸으니 민족의상을 입은 여자아이 두 명이 도로 끝에서 직물을 팔고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치면 중학생 정도의 나이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머니가 집에서 베틀로 짠 것을 딸들이 팔러 다닌다고 합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얼굴은 일본의 아이들과 똑같았습니다. 원주민의 경제적인 자립이 이루어져 이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랐을 때 지역에서 생산한 커피를 맛볼 수 있는 날이 오도록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도로 돌아오니 모던한 건물 앞에 민족의상을 입은 여성이 옥수수 매대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도시라면 현대식 옷을 입을 법도 한데 그녀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옷을 벗으면 제가 제가 아니게 됩니다. 이 의상은 민족 존엄의 증표입니다.”

짓밟혀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더욱 정면에 내세워 높은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는 원주민들. 과테말라 커피의 강한 산미와 묵직한 목 넘김은 억압의 역사를 이겨내 늠름하게 살아가는 원주민의 생명력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잠을 쫓는 커피로 한 잔의 과테말라는 커다란 효과가 있습니다.

노상에서 직물을 파는 소녀 = 2002년, 치치카스테낭고에서

Periodista internacional

Chihiro ITO

국제 저널리스트. 1949년생, 야마구치현 출신, 도쿄대 법학부 졸업. 학창 시절에 쿠바 사탕수수 수확 국제 봉사 참여, 도쿄대 ‘집시’ 조사 탐험가 대장으로 동유럽의 유랑민 ‘로마 민족’을 조사함. 74년,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상파울루 지국장, 바르셀로나 지국장, LA 지국장을 역임하는 등 ‘AERA’ 창간 편집부원으로 동유럽 혁명 현지 취재와 같이 주로 국제 문제를 보도했다. 2014년 9월에 퇴직. NGO ‘코스타리카 평화를 위한 모임’ 공동 대표. 지금까지 82개국의 현지 취재를 진행했다.
공식 홈페이지는 https://www.itochihiro.com/